큰 나무 이야기
이강태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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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19.03.29 18:09
큰 나무 이야기 / 이강태
그곳에 있었다
늘 한결같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
변함이 있는 것은
낮과 밤이 번갈아 찾아오는 것이었고
바람이 머물다간 자리에 싹눈이 달리는 것이었고
햇살이 내려앉았던 자리에 잎들이
자라나는 것이었다
바람 잘 날 없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은
비가 와야 차분히 빗질할 수 있었고
깊이 뻗은 뿌리가 움켜쥔 운명을
놓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
가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들이
약속 없이 찾아와 소란을 떨다가
새 옷에 하얀 똥을 싸고 가기도 했다
다 내주었다
뿌리도 몸통도 앙상한 가지마저도
위태롭게 매달린 마지막 잎새 하나도
다 내주었다
바꿀 순 없을까
기댐도 그늘도 없이. 내가 내뱉은 숨까지도 빼앗아 버린다면 운명이 바뀔까
이기적인 생각에 몸을 떨며
밑둥이 잘린 나의 모습을 바라본다.